3등


'하루'
정재희

작품 해설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의 눈은 관측 할 수 있게 해주고, 관측이 되는 대상들은 빛에 의해 반사되어 보여지게 된다. 본다는 것이 빛에 의한 반사라면 우리는 물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빛을 본다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가 눈으로 확인하는 모든 것들은 빛인 걸까 그 물질인 걸까. 우주의 모든 현상을 파악하는 것은 인간의 관점에 의해서 이해 되어졌다. 지구가 돌지 않고 태양이 돈다고 생각했던 옛적의 생각도 마찬가지로 인간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았기 때문이고, 빛의 의해 보여지는 색깔 또한 인간이 빨간색, 파란색이라고 지정했기 때문이지 그것이 진짜 빨간색인지 파란색인지는 알 수 없다. ‘너’라는 존재와 ‘나’라는 존재가 함께 정해놓은 것으로 소통을 하는 것이지 그 정해놓은 단어로 ‘너’와 ‘나’ 사이에서 무엇이 진짜라고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서로의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면 진짜는 무엇일까. 각기 다 다른 관점으로 보게 된다면 진짜란 과연 있는 것일까. 거시세계에서는 실체가 있어야 대상을 관측할 수 있다. 하지만 너무나 많은 경우의 수에 의해 우리는 인간이 만들어낸 허상 안에 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는데 원자의 구성 속 전자의 움직임이 모두 중첩되어 있다가 관측이 되었을 때 하나로 보여지는 것이라면 우리는 환상을 보며 사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또한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전자가 빛의 영향만으로도 움직인다면 물질은 전자의 성질에 의해 지속적으로 움직이면서 빛을 흡수하고 방출한다는 것이고, 본다는 건 그런 상태를 눈으로 관측한다는 말이 된다. 그럼 우리는 빛에 의한 잔상만으로 물질을 보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보는 물질들은 모두 잔상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이런 잔상은 과연 실재하는 것 일까.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일까. 모든 것이 불확실한 상태에서 가장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는 존재는 ‘나’ 이다. 그런데 ‘나’라는 존재 또한 어떻게 확인 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면 비교대상 없이는 확인할 길이 없다는 걸 알게 된다. 누군가 나를 관측해주지 않는다면 ‘나’도 실재한다고 증명할 수가 없다. 관측을 하고 정보를 얻으려면 서로 영향을 받아야 가능하다. 이 말처럼 인간은 서로를, 세상을 관측하고, 관측하는 것 자체가 실재한다고 믿으면서 살아간다. 한시간 전에 봤던 것이 두시간 후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 물질이 없는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보았기 때문에 있다고 믿는다. 그 믿음은 ‘나’라는 존재를 있게 만든다. 믿지 않으면 ‘나’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작품은 인간이 빛의 흐름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하루를 시리즈로 하였고, 관측자 ‘인간의’ 입장에서 보는 것은 그 물질 그대로 보여지게 하였다. 타 관측자에 의해 증명되어야 하는 인간은 스스로를 관측할 수 없기 때문에 실재하는지 아닌지 확인하기 힘든 잔상처럼 표현하였다. 양자역학에 따르면 우리는 모든 것은 의문투성인 세상에서 살고 있다. 실재하거나 실재하지 않거나 확률에 의해 존재한다. 우리는 무한의 가능성 안에서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