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토마스 명예 교수 (Prof. Paul Thomas, 호주 University of New South Wales Art & Design)

양자역학은 누구도 상상조차 못했던 완전히 새로운 개념이었습니다. 기존 관념을 뒤집는 혁명적인 이론이었기 때문에 양자역학을 발전시킨 과학자들 사이에서도 수십 년간 뜨거운 논쟁이 이어졌습니다. 흥미롭게도 미술계에서 이 새 시대의 흐름을 다양한 방면으로 흡수하였습니다. 20세기, 과학과 예술, 그리고 인류가 서로를 만났던 현장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나는 가능성을 살짝 엿보기만 하는 것 같았다. 다음 여정에서 또 다른 찰나의 경험을 할 때쯤 이러한 가능성은 엷은 안개 속으로 사라진다.’

이번 글에서는 현대 예술과 큐비트(양자 비트) 스핀의 유사성을 살펴본다. 예술과 과학 모두에 있어 생각의 토대를 마련하고 카오스를 받아들이며 불확실성을 즐기고 실패라는 것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고자 한다.

양자(퀀텀) 카오스에 대한 최근 논문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보았다.

큐비트와 관련하여 “스핀”이라는 비유를 생각해 보자. 원자 물리학에서 스핀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스핀(회전)과는 다른 의미이다. 회전하고 있는 공(전자)을 상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스핀은 공도 아니고 회전하는 그 어떤 물체도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지속적인 운동 상태에 있는 얼룩, 자국, 그리고 흐릿한 에너지이다(각운동량).  

전자의 근본적인 특성을 언어로 표현할 때 겪는 어려움, 위치와 운동량을 동시에 측정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 우리는 실패로 단정한다. 역설적이게도, 현대 과학에서 가장 성공한 이론 중 하나인 양자역학은 불확실성, 확률, 가능성에 초점을 두고 있다.

양자역학에 따르면 성공과 실패는 상호배타적 관계가 아니다. 성공과 실패라는 두 상태가 서로와 무관하게 존재한다는 모순적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더불어 양자역학에서는 성공보다는 실패를 더 선호한다. 모순적으로, 실패하지 않았다는 것이 우리의 경험에 영향을 준다. 실패하지 않았다는 것을 실패의 반대 개념인 성공과 동일시하지 않아야 한다. 단순히 말해, 실패란 곁에 함께 할 그 어떤 존재, 친구와 같은 존재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실패는 끊임없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성공이라는 개념은 결국 그 중심에 실패가 존재하는 착각과 같다. 실패는 적응을 가져오고 적응은 새로운 실패와 피할 수 없는 카오스를 유발하며 이는 호기심의 근원이 된다. 이는 성공이냐 실패냐 어느 하나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와 적응이 끊임없이 나타나는 과정이다. 성공은 지속적인 움직임을 멈추게 만들고 호기심을 말살하며 어떠한 결과도 가져오지 않는다. 성공은 불치의 고정된 상태이다. 성공은 생산적 활동의 중단을 의미한다.

현대미술의 핵심에는 완전 실패라는 것이 존재한다. 이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려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다. 각 예술 작품의 실패는 짧은 경험, 숭고한 존재에 대한 찰나, 이해의 순간, 태고의 선물, 즉 삶의 즐거움을 발견할 확률을 포함하고 있다. 예술가는 자신이 현실을 포착할 수 없음을 알지만, 이 불가능한 사실을 예술 속에 표현하기 위해 끊임 없이 노력한다.

현실의 복잡성을 다루려다 실패라고 단정지어졌던 현대미술의 경우, 쾌락주의자들이 처음으로 상상했고 루크레티우스가 표현했던 우스꽝스러운 세상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원자의 예측할 수 없는 움직임을 루크레티우스는 이탈(clinamen)이라고 표현했으며 이는 연역적 추리를 기반으로 했다. 과학은 불확실성을 지속적으로 고민하기 보다는 확실성을 추구하면서 예측할 수 없는 움직임이라는 개념을 거부했다.

20세기 초 불확실성은 예술에서 추상화, 확실성의 파괴, 변화의 수용으로 나타났다. 이는 현대미술에서 심리학적 그리고 형이상학적 내면 세계의 반영으로 표현되었다. 이와 동시에, 하이젠베르크가 주장하는 불확실성에 대한 양자의 세계에 따르면 물질적으로 인간의 육체는 모든 사물과 공존하며 마찬가지로 측정할 수 없다.

로베르토 마타와 볼프강 팔렌의 작품은 예술이 추상적 개념을 받아들인 전형적인 예이다. 가빈 파킨슨은 이러한 수용을 가리켜 양자 현상의 시각적 표현이라고 설명했다.

물리학에서의 새로운 상황은 이들의 예술 작품과 발전을 이해하는데 있어, 그리고 전세계가 불안정한 시기에 초현실주의 집단이 해체된 것을 이해하는데 있어 중요하다. 근본적으로 과학과 예술은 각각 삶 자체의 깊은 단절을 이해하려는 비슷한 목적을 갖고 있으며, 모든 행위에 있어 근간이 되는 보이지 않는 힘을 이미지로 만들어낸다. (Parkinson 2004) 

19세기 중반 사진술의 발명 덕분에 현실을 관찰할 수 있는 자유가 예술에 주어졌다. 루크레티우스의 이탈은 가능성을 다뤘다. 자연을 태어나게 만든 우연한 섭동(perturbance), 생명 창조 방식에 대한 가능성, 인식 가능한 패턴이 나타나는 생명 등이었다. 예술가적 자유는 확률에 있어 패턴을 만들었고 가능성은 존재의 미학과 만났다.

인간은 인간이 알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하지만 탐구는 영원히 이어진다. 이것이 존재의 이유이다. 진리의 모습을 갖고 있는 것이 필요할 뿐 진리 그 자체는 필요하지 않다. 끊임없이 탐구하는 예술은 확률을 추구하며 논리적이지 않다. 이러한 예술에서는 확실성을 죽음이라 생각하며 이에 굴복하지 않는다.

세상을 향해 예술가로서 사물을 표현하는 것은 그 사물의 복잡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예술가는 전체성을 유지해야 하며, 전체를 하나의 단정적 표현으로 축소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상황의 복잡성을 보여주어야 한다. 분자보다 더 세밀한 수준으로 세상을 표현하지 못한다면 지식 속에는 여전히 불확실성이 존재하게 된다.

문제를 인식하는 원근 화법을 세상에 적용해보자. 원근 화법에서 모든 것은 지평선의 점(이하 마크)으로 줄어든다. 양자의 세계에서 측정 실패는 이러한 추상적 마크에 도전한다. 이러한 원근 화법에서의 마크에 대한 관찰자의 측정은 파동을 무너뜨리고 다중 우주(multiverse)를 만들며 이 때 각 마크가 자신만의 새로운 단일 우주에 존재한다. 원근 화법에서의 마크는 모든 가능성을 무너뜨리고 모든 인류에 대해 환원주의이자, 신과 같은 관점으로 세상을 본다.  

원근 화법에서의 마크에 대한 양자 실패는 도전 대상이 되고 있으며 마크(점)를 파동으로 되돌리고 있다. 우리가 세상을 관찰할 때 세상은 마크(점)의 상태로 붕괴된다. 인류가 불확실성을 다룰 수 없어도 마크는 여전히 타당하다. 붕괴는 세상을 단순화시키며, 생각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예술가가 이러한 마크를 다시금 살펴보면 파동은 살아나고 타당성은 돌아오며 마크는 파도로 넘실대는 바다에서 파동이 된다. 이것이 효과와 측정의 차이이다.  

예술 작품은 세상이 하나의 상태로 붕괴되는 것을 어떻게 피하는가? 측정이라는 행위를 피해야 한다. 진리를 추구할 때 바라보는 행위는 보이는 대상에 영향을 주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래도 바라보기만 하는 행위는 자극을 줄 수 있지만 대상을 하나의 상태로 무너뜨리지는 않는다.

양자역학의 관점에서 예술은 실패 속에서 함께 할 완벽한 파트너를 갖고 있다. 즉, 이는 결함이 있는 체계이고 이 체계는 실패를 바탕으로 한다. 이러한 실패는 물리학에서 가장 성공한 몇 가지 이론들이 발전하는데 근간이 되었다. 양자 실패는 현대적 사고에 있어 만능 해결책이 되곤 했다. 양자 실패는 불합리한 것들, 어울리지 않는 어색한 것들을 표면으로 드러나게 할 수 있었다. 또한 불확실성을 향해 나아가도록 했으며, 실패를 이질적인 불안함이 아닌 성공에 대한 부담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들어 주는 존재로 받아들이게끔 할 수 있었다.

양자에 있어 실패는 측정에 관한 멋진 모순이다. 이러한 실패는 진리를 문제화한다. 또한 줄타기 곡예사처럼 왔다 갔다 하는 확률에 투자를 하고 여러 세상에서 곡예 줄 위로 균형을 맞춘다.

에버렛의 다중 우주를 생각해보자. 선택을 해야 할 상황에 놓일 때 당신이 속한 또 다른 하나의 우주를 만들어 볼 수 있다. 선택이란 한 가지 원근 화법적 시각이 아닌 전체론적 진리에 몰입하는 것이다. 이는 당신과 현실은 포함하고 있는 큰 그림과 같다.

예술은 선택을 하는 행위이다. 세상은 관찰을 통해 증식하고 시각화의 복잡도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예술가는 보이지 않는 것을 포착하려 시도하면서 현실을 경험적으로 표현한다. 이는 언어를 초월하며 보는 이들에게 순수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이는 선물이자 존재이며 또는 눈 앞에 보이기 전에 존재하는 것이다.

출처: Parkinson, G. (2004). "Surrealism and Quantum Mechanics: Dispersal and Fragmentation in Art, Life, and Physics." Science in Context 17(04): 557-577.